기타

밀항선 탔던 16세 소년 매출 30조원 거상으로..

체력덩이!! 2010. 10. 18. 22:37

헤드라인

뉴스 > 기획섹션 > 헤드라인

프린트 이메일 전송 리스트

돈 버는것은 기술…돈 쓰는것은 예술
年매출 30조 거대한상 한창우 마루한 회장
기사입력 2010.10.18 16:54:10 | 최종수정 2010.10.18 19:49:39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눈은 세계를 봤지만 가슴은 늘 조국을 향했습니다."

재일동포 사업가 한창우 (주)마루한 회장(80)의 조국 사랑 행보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사재 50억원을 털어 장학재단을 설립한 공로로 10월 초 경상남도 사천시(한 회장의 고향)에서 처음으로 주는 시민대상을 받았다. 경상대학교에는 발전기금으로 3억원을 선뜻 내놓기도 했다.

그는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지만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5일 마루한의 도쿄 본사 28층 접견실에서 한 회장에게서 1시간여에 걸쳐 인생ㆍ경영 철학을 청취했다. 그는 매일경제신문이 주최하는 제9회 세계한상대회(19~21일ㆍ대구)에 참석한다며 차분하면서도 밝은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세계한상대회에 매년 참석하고 있는데 소회가 있다면.

▶1993년 세계한상 총연합회를 설립했고, 2002년 제1회 세계한상대회부터 명예회장으로 참석해 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거상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무한한 긍지를 느낀다. 라오스에 있는 코라오그룹은 한상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코스피 상장도 확정됐다고 들었다. 오세영 코라오그룹 회장처럼 젊고 역동적인 한상들이 계속 배출되도록 돕는 게 우리 같은 1세대 한상들의 몫이다.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상들은 중국 화상을 뛰어넘어 세계 경제를 리드할 수 있는 자질과 역량을 갖췄다.

-경남 사천시에서 시민대상을 받게 된 경위와 소감은.

▶가난한 소작농 아들로 태어나 1947년(당시 16세) 밀항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쌀 두 되와 영어사전 한 권이 가진 것의 전부였다. 사업에 성공한 뒤에도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나 장학사업과 기부활동 등을 계속해 왔다. 한국 정부에서 국민훈장과 체육훈장을 받은 적도 있지만 고향에서 받은 상의 의미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연 매출 30조원의 거대 기업을 일군 경영 철학은.

▶일본인들이 하루에 8시간 일하면 나는 두 배인 16시간을 일한다는 각오로 평생을 살아왔다. 광복 직후 피폐했던 조국을 떠날 때 마음 속에 품었던 `헝그리 정신`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경영신조로 삼는 문구는 `일일부작 일일불식`이다. 하루 동안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면 밥을 먹지도 말라는 뜻이다.

-주력 사업이 파친코여서 차별도 적지 않았을텐데.

▶사업 초기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금융사들이 대출을 해주지 않았다. 사회적 공헌을 해도 성공회의소 입회가 거절됐던 시절도 있었다. 조국인 한국에 가면 나를 야쿠자 두목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차별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 긍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한 게 오늘날의 마루한을 만든 비결인 것 같다. 일본에서 파친코는 도박이라기보다는 국민 오락에 더 가깝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사업다각화를 위해 추진했던 볼링사업이 부채 60억엔을 떠안고 실패한 적이 있었다. 민족계 은행을 설립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좌절됐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을 때는 1978년 당시 16세였던 장남이 미국에서 어학연수 중 사고로 사망했을 때다. 불행이었지만 늘 겸손하면서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긍정적 사고관을 얻는 계기가 됐다.

-미래 경영 전략과 목표를 소개해 달라.

▶현재 연 매출은 30조원에 육박한다. 일단은 매출 50조원을 달성하는 게 당면 목표다. 사업 규모가 늘어나는 만큼 점포 관리와 직원 교육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마루한이 일본 재계의 20대 그룹으로 성장한 이유는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고 정확하게 세금을 내왔기 때문이다.

■ 한 회장은
밀항선 탔던 16세 사천 소년…포브스가 뽑은 日 20대 부자로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온 16세 경상남도 사천 출신 소년이 연매출 30조원의 거대 한상(韓商)이 되기까지.

한창우 회장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광복 직후 일본에 도착한 그는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날이 수두룩했다.

주경야독으로 힘겹게 호세이대학을 졸업했지만 재일 한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일본 사회는 취업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1953년 교토의 작은 마을 미네야마에서 파친코 가게를 운영하는 매형에게 간 것이 파친코 사업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됐다. 파친코 경영에 인재 양성, 서비스 혁신 등을 접목시켜 `마루하니즘`이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세계 한상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했고 포브스가 선정하는 일본의 20대 부자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됐다. 88서울올림픽 때는 재일한국후원회 부회장을 맡았다.

△1931년 경남 사천(옛 삼천포) 출생 △1947년 밀항선을 타고 시모노세키 도착 △1953년 호세이대학 경제학부 졸업 △1957년 파친코회사 (주)마루한 창업 △1988년 서울올림픽 재일한국후원회 부회장 △1991년 상공의 날 대통령상 수상 △1993년 세계한인총연합회 결성 △1994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수상 △1997년 세계한상 무궁화대상 수상 △2005년 마루한 연매출 10조원 돌파 △2010년 경남 사천시민대상 수상

[도쿄 = 채수환 특파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