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닮고싶은 이야기

[스크랩] 2011년 봄

체력덩이!! 2011. 4. 16. 03:35

 

다시 구례로 향합니다.

 

 

이 봄의 마지막 여정이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아마도 내 평생 처음으로 절정기의 벚꽃 구경을 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겠고요.

 

 

4년 전 이맘때 전국일주를 하면서 하동을 거쳐 구례로 향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는 서울서 살다가 구례로 귀촌한 어떤 부부(지리산닷컴)를 만나기 위함이었죠.

무척 설레었고,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4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구례에 통나무집을 지었습니다.

장장 26개월에 걸친 공사기간(?), 수많은 돌발 악재를 헤치며 어려움을 겪으셨을

구례통나무집주인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나 저에게도 수많은 번민과 희망이 교차했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성을 다해 99.9퍼센트 완성을 시켰고, 내 외부 사진을

찍기 위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집주인들을 만나기 전 홀로 구례통나무집 2층 발코니에서 섬진강을 바라봅니다.

금요일 오후, 절정에 이른 벚꽃놀이를 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했고

펜션단지마다 그들이 타고 온 승용차들이 넘쳐났습니다. 과연 토요일인 내일 오전

풍경이 어떨까? 사진만으로 봐 온 섬진강 벚꽃 길, 말로만 들었던 그 무지무지한

차량행렬... 이(?) 약간 기대됩니다.

 

 

 

‘영실봉갈치’로 저녁식사를 하고 집주인부부와 구례통나무집으로 올라왔지요.

실내와 외부조명을 다 켠 채, 늘 그렇듯 이제는 제가 손님이 되어 어색하고 어려운

가운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진 찍고 감탄하면서 스스로 뿌듯해하기도 했습니다.

 

두 분 모두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밤마다 주말마다 정리하고 청소하시느라 피곤에

치친, 그러나 오랜 고생 끝에 새 집을 얻게 된 집주인 부부와 늦은 밤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서로의 수고를 치하하고 서로의 어려움을 위로하는 그런 시간이었지요.

그리고 경산통나무집에 이어 두 번째로 제가 지은 집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오전 간단하게 손봐줄 일을 처리하고 경산으로 향했습니다.

도로는 보시는 바와 같은데, 모두 화계와 쌍계사로 향하는 행락객 차량들이에요.

저야 평생 이런 대열에 끼어본 경험이 없고 그럴 마음이 없으니 이분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만, 이런 행렬은 매년 이어진답니다.

 

몇 킬로미터 이 대열에 동승해 하동을 거치는 길이 빠르나 구례로 나가 순천과 구례

경계지역에 있는 황전 TG 를 통해 광양으로 진주로 그렇게 해서 경산통나무집에 들러

달무리님과 인사를 나누고 집을 둘러본 다음 다시 차를 돌려 울진으로 향했지요.

 

 

 

꼭 4년 전 ‘통나무건축답사여행’길에 울진을 출발해 지났던 포항 울진 간 국도는

전 구간이 4차선으로 변해 과거와는 놀라울 만큼 다른 모습이었으며 개발, 발전이란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화려하고 활기찬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또 다른 ‘가정행복지상주의자’이자 어쩌면 저보다 훨씬 철저하게 이상을 현실로

가꾸어 누리고 있는 달길님 집에서 또 하룻밤을 잤습니다. 어느덧 네 번째인가...?

뜻하지 않았던 쌍전리 후배의 집에서 그리고 달길님 집에서 유쾌한 시간을 보내다

새벽잠에서 깨어 마신 물은 다름 아닌 안주인이 챙겨주신 고로쇠 물이었습니다.

 

 

 

제 몇몇 친구도 그렇지만 집짓기 과정에서 만나는 분들 중 일부 남자 분들은 이런

저의 삶이 부럽다고들 말씀하십니다. 저는 일 년 중 6할 이상 객지에서 잠을 자며

객지 밥을 먹습니다. 위처럼 보이는 경우는 그 일부일 뿐 저에게는 약간의 보상처럼

주어지는 시간입니다만 사실 그나마 ‘일’과 관련된 여정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아들과 함께하는 도보여행, 가족과 같이 해외여행가기 따위는 그림의 떡인 게 현실.

그래도 좋으시다면 계속 부러워하세요. 하하하

 

 

 

여기까지가 올 봄의 마지막 여정인줄로만 알았는데 저 남쪽 고창에서 ‘JU기사’가

연락을 해 왔습니다. “작업장문제로 고민이 많은가본데 내년부터는 다 가능하므로

와서 보고 결정하세요.” 지금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상황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정착을 해야 할 것이고 여러 조건이 수도권에서 그만한 자리를 차지하기 어려우니

어느 지역인가 좀 아래로 내려가야 하긴 할 터인데 그게 지금부터 어느 지역 안에

깊이 들어가기에는 또 어정쩡하고... 머리가 복잡하지만 일단 현황을 보자.

 

 

돌아오는 길에 옥천부모님도 뵐 겸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이 길 또한 세 번째,

아무 조건 없이 골라 쓰라며 천오백 평, 이천 평짜리 논밭을 몇 군데 보여주더군요.

그가 내 입장이라면 고민의 여지가 없는 문제이지만 그와 나의 여건과 환경은 많이

다르므로 장래의 선택으로 미루어 둡니다.

 

 

 

고인돌 유적지를 산책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네요.

아이들 이야기, 농사를 지을 계획이란 그의 이야기, 과거에 대한 추억, 나에 대한

이야기 등... 다리 다쳐 고생하고 있는 ‘스산형님’께 전화도 하고 그랬습니다.

 

 

 

다음날 오전 11시30분 대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아내와 만나 부모님 집에 갔습니다.

고모님들이 꼭 대신 하시겠다 기에 지난달에 있던 아버지 생신 때 가보지 않았죠.

어머니의 화단에는 매화와 수선화가 예쁘게 피었고, 날씨만큼이나 화사한 표정으로

저희 부부를 반겨주셨습니다.

 

 

 

지금은 회복하셨지만 지난 초겨울 아버지가 많이 아프셨습니다. 어머니는 놀라셨고

아버지께 “이제 뭐든 말을 잘 들을게 얼른 일어나시라”며 매우 불안해 하셨지요.

15년 전 서울을 떠나 이 지역에서 살아오셨지만 고향이 아닌 곳에서 소일거리로 하던

밭농사를 지을 기력도 없으시니 적적하고 한편 장래가 불안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다시 대도시로 이사할 생각을 하고 계신다는군요.

 

오랜만에 두 분을 모시고 대전에 나가 외식을 하고 어머니가 챙겨주신 (방사능 사건

전에 선견지명으로 사 두셨다는^^)소금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선뜻 저희가

모시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제 마음이 무겁기만 하네요.

 

 

그래요. 제게 봄은 이렇게 왔습니다.

 

 

 

출처 : 행복한 집짓기
글쓴이 : 우드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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